[돔꾸] 크리스마스 칸타빌레 ©pgtxtcms
커미션쿠쿠2023-04-28 14:53


매끄러운 선율보다 고약한 악상이 더 익숙했다.

백보다 흑이 더 많은 악보를 파일에 무더기로 갖고 다녔었다. 색이 바랜 음표가 빽빽이 들어찬 종이를 더 까맣게 물들이곤 했다. 마구잡이로 뒤섞인 볼펜 잉크와 연필 자국. 연결 신경 써서. 강조 주의.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범재의 삶이란 원래 그런 모양새였다. 눈으로만 악보를 좇을 수 없어 종이에 상처를 남기고, 드뷔시를 좋아해도 때때로 파가니니를 택해야 하는. 자신이 원하는 정도(正道)로 연주해도 충분한 수재들과는 다른. 변주투성이 길이었다.

그래서 츠키오카 쇼우는 늘 정도(程度)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했다. 적당히는 충분하지 않은 걸 알아서. 열 손가락이 부르트고 두 어깨가 저려와도 현을 잡았다. 지독한 악보를 이겨 먹을 때까지.

스포트라이트 대신 요코하마의 조명이 두 남녀를 비추었다. 거리에는 정겨운 캐롤이 울려 퍼졌다. 반대로 츠키오카 쇼우의 시선에선 찬 바람이 불었다. 제 기분과 대조되는 분위기에 김빠진 헛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아 겨울은 겨울이구나. 지금이 크리스마스이브는 맞구나. 데이트랍시고 지금 눈싸움을 하는 게. 몇 분째 기 싸움을 하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제가 날짜를 착각한 줄만 알았다. 

너 진짜 안 갈 거야? 울컥한 목소리가 망가진 바이올린처럼 올라갔다. 오랜만에 신은 구두 탓인가. 다리는 자꾸 고장 난 페달처럼 삐걱댔다. 추위에 빨개진 손이 표정과 함께 굳어갔다. 짜증 나, 저질, 진짜 최악. 너도 알지 도모토 타이가? 숨 쉴 박자도 없이 짜증을 쏟아부었다. 그러든 말든 도모토는 공연을 보듯 팔짱을 끼고 그녀를 가만 지켜봤다. 얼굴에 핀 웃음을 가리려는 노력도 없이. 그래서 더 빡쳤다. 열 받는 와중에도 상쾌한 미소를 짓는 저 얼굴은 좋아서. 쓸데없이 뿌리고 온 향수는 취향에 완벽하게도 들어맞아서. 그리고…

“내가 말 안 해도 잘 알잖아 아가씨.”

뻔뻔한 자신감은 늘 사실에 기반해서. 그를 부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최악이든 뭐든, 안 갈 거야 그 데이트. 명확한 의사 표현에 말문이 막혔다. 얹힌 거라곤 눈송이가 전부인데. 어깨가 아려왔다. 익숙한 통증. 욱신대는 뒷골을 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좋아하는 것들은 언제나 저를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협주곡의 악보도, 애매한 재능의 산물도. 빌어먹을 도모토 타이가도. 지독한 악상을 닮은 사내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조금 전까지 구두 신은 걸 후회했는데. 이제는 탁월한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183센티미터의 남성이 그랜드 피아노라도 되는 것처럼, 쇼우는 뒤꿈치를 들어 그대로 도모토의 발등을 페달처럼 밟았다.

“악! 아…. 야...스읍...너어...억.”

“아아, 그래. 가지 말던가! 지가 나와 놓고 웃겨. 누가 보면 억지로 끌고 온 줄 알겠어?”

이 삼대가 망할 나쁜 놈아! 정겨운 음악과 주변의 웅성거림이 악기처럼 깔렸다. 배경음에 맞춰 발등을 연주하던 콘미스는 씩씩대며 무대에서 뛰쳐나갔다. 어이, 어디 가는데. 잠깐, 너! 야! 츠키오카! 박수갈채 대신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귀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우리의 콘미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이를 악물고 달렸다. 새하얀 눈 위에 까만 발자국 음표처럼, 제가 남겼던 노력의 흔적처럼 찍혔다.

 

어떤 고약한 악보든 그녀는 지지 않았다.




*

 

 

 

나 질문이 있는데. 책상 위에 펼쳐진 문제집과 잘 어울리는 대사였다. 시선이 빗나간 것만 빼면. 페이지 위 동그라미와 가위표는 찬밥 신세였다. 그녀는 오로지 탁상달력의 붉은 별표에만 관심이 있었다. 12월 25일. 너 25일에 약속 없지? 의문형이었으나 확신에 가까운 어투였다. 다소 뜬금없는 물음에 도모토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나도 질문 있는데.” 

“내가 먼저였는데.”

“글쎄 내가 더 급할 거 같은데 우리 콘미스님?”

“왜 새치기야. 그리고 당분간 바이올린 잡을 일도 없는데, 콘미스는 무슨…” 

“그러니까. 바이올린 대신 당분간 책 잡기로 한 거 아니었나?”

커다란 손가락이 페이지를 톡톡 두들겼다. 내가 지난주에 알려준 건 다 까먹은 건가, 아가씨? 아. 눈 대신 비가 내리는 페이지에 쇼우의 입이 머쓱한 원을 그렸다. 슬쩍 표지를 닫고선 티 나게 눈동자를 굴린다. 그 방향을 따라 도모토의 입꼬리도 피식 올라갔다.

“어디에 정신이 팔리셨나 했더니, 크리스마스?” 

“그래서 되는 거야 아니면 거절이야.”

시간이 안 된다는 대답은 선택지에도 없네.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고집을 눈치 챘는지 도모토 또한 책을 덮었다. 팔짱을 끼고 무언갈 생각하는지 그녀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노골적인 시선에 자꾸만 마른침이 넘어갔다. 갑자기 조용해져서 그런가. 낮게 쿵쿵대는 제 맥박 소리에 자꾸 신경이 쏠렸다. 원래 친구한테 약속을 물을 때 이렇게 떨리나. 늘 과외만 하면 숙제를 잘했다고 상으로 커피, 성적이 저조하니 기분 전환을 해야 한다며 크레페 집, 약속만큼 못 맞추었으니 벌로 밥 사기. 그마저도 먼저 나간 뒤통수를 노려보며 카드를 꺼낼 때마다-남성분이 이미 계산하셨어요 같은-직원의 멘트를 듣기 십상이었다. 그 모든 흐름이 자연스러워 의식한 적이 없는데, 도모토 타이가가 뻔뻔한 건지. 아니면 도모토 타이가한테는 그게 일상인 건지. 괜스레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흐음 거절하면 콘미스께서 날 가만두지 않을 모양인데”

“착각이겠지. 그렇지만 바이올리니스트들은 팔 근육이 발달했다는 것만 알아 둬.”

“협박인가? 아가씨가 그런 짓은 어디서 배운 거래” 

“누구겠어.”

입 대신 정답을 가리키는 눈에 도모토는 웃음을 터트렸다. 뜨거운 시선에 응답하듯 팔을 뻗어서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머리칼을 살살 가르는 손목에선 서늘한 스킨 향이 났다. 글쎄, 누구인지는 몰라도 성격 나쁜 건 한 명으로 족하다고 생각할 거 같네. 작게 중얼거리고선 입을 다물었다. 침묵 속 빤한 시선만이 오갔다. 묘해지는 분위기를 깬 쪽은 도모토였다. 그날 사람 많을 텐데. 사람 구경도 묘미라잖아. 꽤 추울 거고. 무대 조명에 달궈져도 봤는데 이번에는 얼어보지 뭐. 바쁜데 스케줄 괜찮겠어? 나 바쁜 거 알면 기회 줄 때 잡지, 그것보다 너 언제까지 토 달래? 팽팽한 공론이 오갔다. 지는 쪽은 정해져 있음에도. 백기 대신 김 빠진 웃음이 도모토한테서 새어 나왔다.

“그러지 뭐, 딱히 특별한 것도 없는 날이니.”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 썩 달갑진 않았다. 끝말이 신경 쓰이는 걸 티내고 싶진 않아서. 부러 반응을 과장했다. 그래, 그때 가서 딴말하면 죽어 진짜. 협박에도 도모토는 실실 웃을 뿐이었다. 실은 특별한 거 하나 없다는 그 문장이 틀렸다 증명해주고 싶어서. 그래서 잡은 약속인데. 진실은 입속에 잠깐 묻어두었다. 저조차도 이게 고집인지 투쟁심인지. 혹은 그도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냈으면 하는, 쓸데없는 욕심인지 모르겠어서. 생각을 환기하려 말을 돌릴 뿐이었다. 

“근데 너 향수 바꿨어?”

“아니? 너 오기 전에 씻어서. 아마 빨랫비누 냄새일걸.” 

“….”

“거품만 나면 다 똑같지 뭐.”

다른데. 샤워기 헤드와 싱크대의 용도처럼. 친구와 연인이 다른 것처럼. 다른 달과 12월의 25일이 다른 것처럼.

 

구태여 말하지는 않았다.

 

 

 

*

 

 

 

발뒤꿈치가 욱신거렸다. 얼어붙은 분수대에 걸터앉았더니 엉덩이도 시려왔다. 이게 다 도모토 타이가 때문이야. 썩을 도모토 타이가. 망할 도모토 타이가. 재수 없는 이름을 속으로 잔뜩 씹었다. 새빨개진 코끝을 훌쩍였다. 바람이 제법 찼다. 그래도 서러움을 추위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어두워진 하늘에도 거리는 여전히 밝았다. 일루미네이션 명소를 찾기 위해 몇 시간 동안 휴대폰을 잡았었는데. 그마저도 소용이 없게 되었다. 새하얀 입김이 짙은 한숨을 타고 나왔다. 피곤했다. 변주에 익숙하다 해도 예상외의 일들이 썩 유쾌한 건 아니었다. 오늘처럼 전부 안 풀리는 날이면 더더욱.

죄송합니다. 저희가 공연 스케줄 변경으로 입장이 어려우실 거 같아요. 티켓 매대의 직원이 고개를 숙일 때까지만 해도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이어 방문한 비누 공방에선 다 떨어진 향료로 인한 조기 마감이 그들을 반겼다. 빨랫비누를 대량으로 사뒀으니 괜찮다는 대답이 어이없었지만 괜찮았다. 점찍어둔 레스토랑으로 이동할 때부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게 느껴졌다.

거리가 꽤 멀다는 걸 망각하고 걷다 보니 다리가 저렸다. 가게 앞에 도착했을 때 도모토는 지친 건지 바닥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희가 풀 테이블로 예약자도 웨이팅이 1시간이라, 괜찮으신가요? 상냥한 안내가 야속하게도 들렸다. 구두 속에서 부르튼 발끝을 꼼지락댔다. 난처함에 발이 묶여버렸다. 어쩌지. 얼어버린 어깨 위로 단단한 팔뚝이 느껴졌다. 붙잡은 제 몸으로 얼굴을 기울이자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가자. 귓가에 그가 속삭였다. 명령조와는 다르게 제 몸을 돌리는 팔의 힘은 조심스러웠다. 줄에서 빠져 거리로 나오자 팔을 거두었다. 그녀 또한 급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기다려봐 다른 곳도 내가 찾아둬서. 두 정거장 정도 가야 하긴 하는데 다른 곳도 찾아뒀긴…”

“아니 그만하자.”

피곤하잖아 아가씨. 냉담한 답에 쇼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피곤한데. 내가? 아님 네가? 그리 묻고싶은 마음을 참았다. 제 불찰은 맞았으나 의욕 없는 표정을 보고 있으니 맥이 빠지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나왔으니까 뭐라도 하면 좋잖아. 글쎄 욕심 아닌가. 낮게 읊조린 말이 가슴에 박혔다.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둥근 머리밖에 보이질 않았다. 눈조차 안 마주치는 건가 이제. 건성으로 보이는 태도에 짜증이 올라왔다. 추위가 맨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순간 허무함이 밀려왔다. 불편함이 다른 감정들을 덮어버렸다.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그렇게 싫은 티 낼 것까지는 없지 않나. 쏘아붙이는 말투에 드디어 그도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곤 옛날과 별반 다르지 않은 싸움의 시작이었다. 그 결말은 이브의 거리에 홀로 남은 자신이었고. 어쩌면 예정된 싸움이었을지도 모른다. 매정한 현실만을 말하는 남자. 매정도 정이라면 온정으로 바꿔주고 싶었던 제 욕심. 딱 봐도 궁합이 잘 맞는 단어 같진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애꿏은 바닥만 툭툭 발끝으로 찼다. 돌아가는 게 합리적인 선택임을 저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특별한 날이었음 했는걸.” 

“그렇게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속상함에 뱉은 혼잣말에 답이 들렸다. 어떻게 찾아낸 건지 새하얀 패딩을 걸친 원흉이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뭐야 꺼져. 환영 인사가 격하네. 제 짜증을 무시하고서 그는 대뜸 무릎을 꿇었다. 커다란 손이 작은 발목을 감쌌다. 그를 밟았던 구두를 손에 쥐고선 그대로 잡아당겼다. 내내 발을 옥죄던 신발이 힘없이 벗겨졌다. 야 미쳤어? 상처투성이가 된 발등에 한기가 일었다. 겨울의 칼바람이 고스란히 살갗에 느껴졌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발버둥 쳐봐도 그는 손 하나로 손쉽게 그녀를 제압했다. 콘미스가 왜 아까부터 팔도 아니고 발을 쓸까. 가슴팍을 때리는 발길질에도 한 번을 흔들리지 않고, 실없는 농담이나 던질 뿐이 었다. 웃어? 웃겨? 내가 웃기냐 너? 잿빛 뒤통수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응, 웃기지. 늘 웃긴 아가씨였지. 풋내나는 이상을 현실처럼 떠들어대고, 그에 걸맞은 이상한 용기를 가지고 있는.”

너 말고 누가 길거리 한복판에서 사람 발을 밟을 생각을 하겠어. 그의 헛웃음과 함께 차가웠던 발에 복슬복슬한 온기가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못 보던 물건이 생겨있었다. 눈 바닥을 뒹구는 구두 옆에 쇼핑백이 놓여있었다. 잡아. 자연스레 그녀의 팔을 제 어깨에 올린 채 그는 나머지 발 한 짝에도 부츠를 신겨주었다. 빳빳한 새 신발의 감촉이 어색했다. 뭔데 이거. 뇌물. 뻔뻔한 답변과 함께 그는 무릎을 탈탈 털며 일어섰다.

“말했잖아 특별할 필요 없는 날이라고.”

작년도 마주침과 사탕 하나가 전부였던 크리스마스였던 걸. 흐리는 말꼬리와 달리 전달하고픈 말은 선명했다. 이거 때문이었어? 물어도 어깨만 으쓱하고 넘길 뿐이었다. 편안해진 발끝을 꼼지락댔다. 애초에 필요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데이트를 구분 짓는 것도, 화려한 레스토랑의 음식도.

...나쁘지 않은 크리스마스였음 했어. 작년에도 나쁘지 않았어. 올해는? 글쎄 아직 크리스마스도 아닌걸. 이브잖아, 덧붙이는 말에 피식 웃었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닌 거 알면서. 핀잔을 주면서도 낯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끝까지 현실적인 남자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멋대로 데이트를 쫑내고 미운 소리만 하는 현실한테도 상대를 신경 쓰는 진실이 있으니까. 아무리 꼬인 악보여도 결국엔 아름다운 선율이 완성되는 것처럼. …그거 알아 도모토?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팔을 붙잡았다. 까치발을 들자 자연스레 몸을 제게로 숙였다.

“네가 싫어도 근데 특별할걸.”

여기 우리가 그때 마주쳤던 거리인데. 이래도 오늘이 안 특별해? 이겼다는 듯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고 도모토는 웃음을 흘렸다. 뭐해, 들어가기 전에 그래도 트리는 봐야지. 저보다 몇 배는 작은 손에 그는 힘없이 끌려갔다. 나무에 걸린 조명들이 두 주인공을 비추었다. 북적이는 인파 사이로도 서로의 낯이 선명했다.

 

아까처럼 길 잃는 건 아니지 아가씨? 

너나 힘들다고 또 불평하지 마시지. 에취!

 …역시 들어가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빨랫비누로 세수하는 놈한테 그런 소…엣취! 으엣취! 

이거라도 걸치는 게 낫겠... 푸흡.

미리 말하는데 내가 작은 게 아니라 네가 긴 거다. 

그래 그래 네 말이 옳지.







결국 이번 크리스마스도 네가 있어서 특별해졌으니까. 

네가 옳았네, 이번에도.

 

 

 

 

 ©장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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