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쿠쿠] 봄에는 운명을 심고 @pgtxtcms
커미션쿠쿠2023-04-28 16:23


화이트데이 편지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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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퍽 따듯해졌습니다 쇼우. 칙칙했던 화단에도 다시 색이 피어날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겨우내 비었던 화단에 무얼 심을지 이번에도 꽤 기대됩니다. 프리지어는 어떨까요. 골목길 꽃집이 샛노랗게 물든 게 예쁘군요. 풋풋하게 피어오른 색채를 보고 있자니 쇼우가 떠올랐습니다. 생각해보니 얼굴을 본지도 꽤 시간이 지나서요.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바쁜 탓에 떠오른 말들을 글로 대신합니다. 날이 풀리니 찾는 자들이 많아져 거리와 왕성을 비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무릇 이해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겨울에 함께 장터를 찾은 게 어제 같은데, 정말 봄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예고 없이 길바닥 한구석에 자리 잡는 게 누군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잠들었던 계절이 돌아올 정도로 우리가 마주한 그 날이 벌써 오랜 일이 되었습니다. 믿어지시나요. 아직도 저는 황망했던 두 눈동자가 선한데 말입니다. 그래도 먹구름처럼 막막했던 눈에 이제는 말간 햇볕이 비치는 걸 보면, 그날의 만남이 참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기사로서 당연히 베풀어야 할 도리를 행한 것이 전부이지만요. 

 

이제 일은 어느 정도 손에 익었습니까? 펠트님이 전해주신 바로는 일하면서도 입버릇처럼 척추 수술을 읊조렸다고 그러더군요. 부디 몸조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더욱이나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추위가 가실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기사단원들도 검을 휘두르는 손이 굳을까 초조해하더군요. 궂은 집안일들이 날씨와 맞물려 괴롭히지 않았을까 걱정입니다. 다들 힘든 일을 떠넘기진 않았겠지만 아무래도 지난 식사에서 여전히 잼 뚜껑을 끌어안고 씨름하던 걸 떠올리면... 여러모로 신경이 쓰여서 말이죠. 외출이 잦아 옆에서 도울 수 없다는 게 아쉽습니다. 근래보다 여유로웠다지만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습니다. 네가 바쁘지 않은 날이 어디 있겠냐고 답하시겠지만,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을 내팽개치는 사람으로 쇼우에게 기억되고 싶지 않아 덧붙입니다. 

 

참, 케이크 감사했습니다. 2월 14일이었으니 벌써 한 달이 흘러버렸네요. 철 지난 편지에라도 뒤늦게 감사를 담아 보냅니다. 저택에서 꽤 먼 거리였을 텐데 이곳까지 들러주시다니. 바쁜 탓에 오래 말을 나누지 못했지만 정말 기뻤습니다. 바쁜 일정 탓에 저택에서 식사한 것도 오래전 일이었는데, 덕분에 못지않은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평소와는 다른 기쁨이기도 했고요. 남들을 위한 선물이 아닌 나 하나만을 위한 선물은 처음이었습니다. 나누는 것만이 기쁨인 줄 알았는데. 한 사람만을 위해 존재하는 마음 또한 아름답네요. 언제나 맛볼 수 있는 케이크가 유달리 기억에 짙게 남았다면 이 때문이겠지요? 

 

달콤했던 호의를 고작 글자 몇 개로 답하는 건 도리가 아닌 듯싶어 작은 선물을 함께 보냅니다. 거리를 나가보니 초콜릿과 사탕들을 사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고민하다 직접 만들어주신 케이크에 비해 스위츠는 너무 작은 것 같아 다른 선물을 동봉합니다. 대장간 외에는 가게들에 얼굴을 비출 일이 없어서 그런지 누군가를 떠올리며 물건을 고른다는 건 색다른 일이더군요. 여인들이 좋아하는 것들에는 문외한이라 다소 걱정은 되지마는 잘 어울리리라 생각해서 보냅니다. 작은 목걸이입니다. 가게 주인이 추천한 화려한 비단 자락의 드레스나 채도 높은 향들이 춤추는 향수들은 부담스러워할 것만 같아서요. 반지나 팔찌는 일할 때 걸려 거추장스러우리라 생각하여 골랐는데, 취향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선물은 직접 주는 게 예의라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아쉽습니다. 꽃다발도 시들 것 같아 다음에. 다음에 직접 손에 쥐여 드리겠습니다.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의 끝을 자꾸 약속으로 맺음 짓게 되네요. 다음에, 바빠서, 언젠가. 이런 단어들을 떼어놓기가 어렵다는 걸 편지를 쓰면서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이 운명을 미워하는 건 이런 연유에서일까요. 그래도 저는 엇갈리는 시간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존재에는 항상 가치와 증거가 따라붙으니까요. 이유가 있기에 얄궂은 운명도 존재한다 생각합니다. 그러니 엇갈리는 시간을 미워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렇겠죠? 길에서의 마주침도 둘 다 예측했던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쇼우와 저의 만남도 시간이 엇갈렸기에 일어난 운명일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운명에 대한 원망과는 별개로 그리움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검성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에 불만은 없지만, 가끔 저택에서 칭호 없이 지내던 날들이 종종 떠오릅니다. 거리를 거닐 때 비추는 햇살이 쇼우의 눈과 닮아서일까요. 거리를 뛰어다니는 작은 뒷모습들을 보면 펠트 님이 떠올라서일까요. 웃고 떠드는 낯선 하인들의 모습에서 프람, 그라시스 그리고 할멈과 할아범이 보여서일까요. 날이 따스해서인지 종종 뜬구름을 닮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금방 지워지지만요. 그래도 뺨에 기분 좋은 바람이 스치고, 길거리에서 사람들의 따듯한 만담이 귀를 지나칠 때면 어딘가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시선을 쬐고 있단 생각이 듭니다. 보이진 않아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그런 걸까요? 결국, 이번에도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의문으로 끝맺습니다. 

 

그래도 저는 쇼우를 만나면서 의문투성이로 변해버린 제 삶에 만족합니다. 정해진 결말보단 모르는 이야기가 더욱더 즐거운 법이니까요.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는 선물 상자를 볼 때와 비슷한 느낌 아닐까요. 이 관계의 속 자리한 선물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리본처럼 모든 답이 풀어진다면. 그런 날이 온다면. 아마 쇼우가 했던 말들을 저도 이해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답을 찾기 위해 쇼우의 입을 빌리고 싶습니다. 글에는 미처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찾아뵙겠습니다. 보내지 못한 꽃들도 함께 들고서요. 

 

직접 걸어드리지 못한 목걸이도 그때 채울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봄날의 햇볕을 잉크 삼아, 

라인하르트 반 아스트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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